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2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앙리 2세와 [[카트린 드 메디시스]]의 [[장남]]으로 결혼 11년 만에 태어난 첫 아들이라 그의 할아버지 [[프랑수아 1세]]가 대단히 기뻐하며 후계자로 지명했다. 4세 때인 1548년 1월 27일 [[스코틀랜드]]의 [[메리 여왕(스코틀랜드)|메리 여왕]]과 약혼했고, 14세 때인 1558년 4월 25일 결혼했다. 메리 여왕은 부왕 [[제임스 5세]]가 급사하자 생후 9개월 만인 1543년 9월 스털링에서 이미 여왕으로 즉위한 상태였다. 프랑수아 2세도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하자 1559년 7월 10일 프랑스 왕이 되었다. 메리 여왕은 [[제임스 5세]]의 외동딸이었으니 프랑수아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이 프랑스-스코틀랜드 [[동군연합]]의 왕이 되었을테고, 거기다가 메리 스튜어트의 증조 외할아버지는 [[헨리 7세]]였으니 그 아들은 [[잉글랜드]] 왕위까지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다. 실제로 [[튜더 왕조]]가 [[엘리자베스 1세]]를 끝으로 대가 끊기면서 [[헨리 7세]]의 후손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아야 되자, 메리 여왕이 두 번째 남편 [[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]]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[[제임스 6세]]가 잉글랜드의 [[제임스 1세]]가 되어 잉글랜드-스코틀랜드 연합의 국왕이 되었다. 만약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튜더 왕조의 대가 끊기는 동시에 프랑수아 2세가 오래 살아 메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더라면, 현재의 대영제국+프랑스 동군연합이라는 광대한 제국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었다. 문제는 프랑수아 2세가 어리고 통치능력이 없었으며, 약골이라 병치레를 자주 했다는 것이다.[* 어린 시절부터 키가 작았고 말까지 더듬었다.] 결국 왕이 되닞 고작 17개월만에 쓰러져 16세로 일찍 사망하면서[* 사인은 중이염과 뇌수막염으로 추정된다.] 짧은 결혼생활 동안 메리 여왕과의 사이에서 자손을 두지 못했다. 메리 여왕은 시어머니 [[카트린 드 메디시스|카트린]]을 상인이었던 [[메디치 가문]]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는데, 이는 자식도 없이 프랑수아 2세가 [[요절]]하자 되려 카트린에 의해 스코틀랜드로 쫒겨나다시피하는 원인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